망각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소녀는 자라서 베네치아에서 가장 각광받는 화려한 여자가 되었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이름마저 버린 채 이십 년을 쫓겨 다니다 숨을 거두었고, 그 여자를 쫓던 남자는 그 곁에서 운명을 같이 했다.
서울. 월세 60만 원짜리 낡은 상가 3층.
우상은은 이사 첫날 복도 바닥이 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본다. 일곱 살 때부터 늘 그랬다.
그는 세월의 윤곽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세상에서 가장 똑똑히 보는 사람이면서, 평생 그 풍경에서 달아나기만 한 사람이다.
왜냐고? 무서우니까.
세상에는 모든 형체를 흐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국이 식고 쇠가 녹슬듯 사람이 남긴 자국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져 내린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없게 퍼질 뿐이다.
그런데 다 흐르지 못하고 어딘가에 걸려 멈춰버린 것들이 있다.
주차장 시멘트 밑에 묻힌 오십 년 전 당산나무 밑동.
아이들이 자꾸 그만두는 2층 피아노 학원.
큰길 건너 공사장 구덩이에서 나온, 오십 년 전 정월에 제가 끊긴 뒤로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제기 여섯 점.
그리고 500년 전의 그 남자가 지금 서울로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