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표지

망각은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메로빈지언 - 1540년 파르마. 죽어가던 화가가 자신의 마지막 그림을 화로에 던졌다. 일곱 살 소녀가 불길 속으로 맨손을 넣어 그것을 건져냈다.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초상이었다. 왼손등에 남은 화인은 평생동안 아물지 않았다.

소녀는 자라서 베네치아에서 가장 각광받는 화려한 여자가 되었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이름마저 버린 채 이십 년을 쫓겨 다니다 숨을 거두었고, 그 여자를 쫓던 남자는 그 곁에서 운명을 같이 했다.

서울. 월세 60만 원짜리 낡은 상가 3층.

우상은은 이사 첫날 복도 바닥이 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본다. 일곱 살 때부터 늘 그랬다.

그는 세월의 윤곽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세상에서 가장 똑똑히 보는 사람이면서, 평생 그 풍경에서 달아나기만 한 사람이다.

왜냐고? 무서우니까.

세상에는 모든 형체를 흐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국이 식고 쇠가 녹슬듯 사람이 남긴 자국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져 내린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수 없게 퍼질 뿐이다.

그런데 다 흐르지 못하고 어딘가에 걸려 멈춰버린 것들이 있다.

주차장 시멘트 밑에 묻힌 오십 년 전 당산나무 밑동.

아이들이 자꾸 그만두는 2층 피아노 학원.

큰길 건너 공사장 구덩이에서 나온, 오십 년 전 정월에 제가 끊긴 뒤로 아무도 손대지 않은 제기 여섯 점.

그리고 500년 전의 그 남자가 지금 서울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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